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교회의 허상과 업신여김 당함 (2)

맑은바람청풍 2016. 7. 1. 12:37


[묵상] 교회의 허상과 업신여김 당함 (2)

주제 성구 = 고전11: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교회가 업신여김 당한 사례들

 

너무 많아 일일이 정리할 수조차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다고 봐도 크게 잘못된 인식은 아닐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아주 비근한 사례를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32:1-6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아론과 백성들이 자기들의 신을 만듭니다.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는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난리 났습니다. 이방인들의 행동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런 망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후부터 사울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역사서입니다. 반복적인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주제입니다. 전체가 교회의 업신여김 당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사사기 19-21장은 시대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의미의 심장함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대요는 어떤 레위인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파 간에 전투가 일어나게 되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느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근원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주 타락한 상태였지요(이스라엘 내에서 동성연애가 극심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동기는 레위인의 타락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 성막에서 봉사하는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의 첩이 음행하여 도망가자 친정까지 찾아가 그녀를 데려오다 베냐민의 기브아에서 문제가 생겨 버렸습니다. 그곳 거민이 그의 첩을 윤간하고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 분개한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온 지파에 돌립니다. 화가 난 전 지파가 일어나서 베냐민 지파를 응징합니다.

 

레위인의 자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면, 자신의 과오를 살피면서 반성했어야 합니다.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오기에 젖어 지파 간 싸움을 부채질합니다. 자신의 임무도 망각했고 민족의 단합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생각하지 않는 지극히 철면피한 행동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은 솔로몬입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며 특히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룬 왕입니다. 그런 그도 후일 엄청나게 타락합니다. 아내를 무려 천 명이나 둡니다. 아내 천 명은 천 가지의 이방신을 의미합니다(왕상11:4-8).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시기 중의 한 시기입니다(남북 분단의 원인입니다). 가장 현명한 성도도 가장 심하게 타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물론 나중에 전도서를 쓰며 돌아오기는 했지요). 아무튼 이것도 성도가 한 짓이었습니다.

 

왕하23:4-14절을 보면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때 제거한 내용들을 보십시오. 성전은 온갖 잡신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심지어는 남창(미동)이 성전에 거하기도 했습니다(7). 이게 이방신전의 모습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현실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타락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의 모습입니다. 이방신인 담무스와 동방태양신 등이 버젓이 성전에 세워져 있습니다. 장로든 백성이든 이런 우상을 끔찍이도 열심히 섬깁니다. 그 결과 어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6).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도 부끄러운 사례가 나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초기에 성전 재건에 매진할 때, 이를 방해한 대표적 이방인들은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훼방을 놓습니다(2:10, 19, 4:1-3, 7-8, 6:1-9). 느헤미야의 굳건한 지도력으로 모든 어려움과 방해를 이겨내고 성전 재건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유대의 지도자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습니다. 그들을 칭찬하며 심지어 자녀들을 결혼시키기까지 합니다. 힘을 얻은 이들이 느헤미야를 압박하기에 이릅니다(6:17-19).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잠시 바벨론을 다녀오는 사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만 거주할 수 있는 성전의 방에 도비야가 살도록 합니다(13:4-9). 느헤미야가 겨우 정화를 시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유대 지도자들, 다시 말해 교회가 이런 짓을 한 것입니다. 뻔뻔함의 도를 넘어선 이같은 행동도 교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아예 성경 전체가 이러한 고발로 가득 차 있는데 말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들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교회와 성도들이야 무지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신약이라 해서 구약시대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2가지 경우만 살펴보겠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교회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의 교회를 지칭하지만, 편의상 주님 오신 이후부터를 신약교회로 간주하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유대교회)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철저히 배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무어라 합니까?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 하였겠나이다”(18:30). 예수님이 행악자랍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답니다. 누구의 판단입니까? 이방인의 생각인가요? 아니요, 교회의 생각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까지도 행악자로 몰아붙일 수 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9:12절은 이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빌라도까지 무죄를 인정하고 석방하려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사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그것이 잘못된 맹신일 수 있으며 심지어 주님에 대해서조차 이런 망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니까 그렇지, 현대 성도는 그럴리없다고 변명하시렵니까? 아니요, 유대인이든 성도든 이럴 가능성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지역교회들을 세심하게 살펴보십시오. 가장 성경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현상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입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존재이면서도 왜 타락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가?

 

신구약 성경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교회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가 어째서 이리 될 수가 있을까요? 답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우리의 눈이 감겨져서 볼 수 없고 우리의 귀가 닫혀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에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기독교)의 맹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는 조금 후에 다시 해결방안을 생각해 보기로 할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의 타락 가능성은 대단히 큽니다. 그런데 타락은 언제나 소위 하나님의 무리라는 선민들로부터 출발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시작되며 성전으로부터 시작되며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거시적 안목에서 성경은 죄의 본질을 교만과 불순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선악과 취식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깨우친 또 다른 원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타락이 항상 내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공동체를 보호하겠다는 열심의 변질에 있다고 봅니다.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구약 백성이든 신약 교회든 의도적으로 타락을 목표한 경우보다, 오히려 선민과 성전과 교회를 잘 보존하겠다는 충성심이 결과적으로 철저한 타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이를 달리 말하면 비뚤어진 선민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일 것 같은 이러한 생각이 과연 맞을까요? 성경을 조금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선민인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말씀들은 무척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말씀을 정리하여 613개의 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극적인 금지령(하지 말라)365개 조항이며 적극적인 시행령(하라)248개 조항입니다. 모두 성경에 기초한 옳은 항목들입니다.

 

그중에서 공동체 보호의 핵심이 되는 개념은, ‘공동체의 변질 현상이 나타났을 때는 과감하게 이를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하라(12:17), 돌로 치라(13:10), 악을 제거하라(17:7), 제하여 버리라는 명령들(축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임을 의미합니다)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받아야 할 말씀들입니다(가나안 진멸도 공동체 보호가 목적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정신은 그대로 신약교회에까지 이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조치를 출회 또는 출교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9:22, 12:42, 16:2). 과연 출교(출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출교란, 공동체로부터의 퇴출 내지 분리를 의미합니다. 보다 성경적인 개념으로는 바로 단죄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성경적인 죄의 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공동체를 해치는 죄악을 제거하는 것이 곧 출교인 것입니다.

 

- 출교의 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악을 제거하여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하자는 것이지요.

 

- 출교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선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요 유대인이며 교회 성도인 것입니다. 세상은 지켜야 할 순수성이 없기 때문에 결코 출교가 없다는 점과 상이한 점일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출교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이 생각은 조금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큰 안목에서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기독교와 불교 및 기타 종교에 관한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금방 이해되실 것입니다. 기독교 사이트는 거의 대부분이 격렬한 논쟁으로 뜨겁고 심하면 극단적인 욕설과 저주까지 난무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불교 사이트는 이런 내용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정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순수성을 유지하고픈 열정이 잘못 빗나가 이러한 현상까지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출교의 결정권은 선민(성도)들이 행사하고 있습니다.

- 출교의 결과는, 공동체로부터의 분리이며, 이는 그 사회로부터의 매장을 의미하고, 구약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기까지 하였습니다(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출교의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기독교에 있어서 출교란 전목적적(全目的的)인 의미를 지닙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결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이 출교입니다.

 

- 이제, 이 묵상의 취지와 관련시켜, 출교의 문제점을 짚어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출교란 좋은 것입니다. 꼭 있어야 하는 지침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의 이해부족인가요? 아니면 무식의 소치인가요? 제발 그렇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은 출교의 문제점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펴보지요.

 

교회의 잘못된 출교들

 

이런 사례도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과 교회 역사 전체가 이러한 실패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대표적인 사건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6:30절은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방신상을 파괴한 기드온을 정죄하는 장면입니다. 가나안의 이방인들의 재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재판 모습입니다. 뭡니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제거한 것이 당연히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100% 순종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리고 그 효과도 더 큰 것처럼 보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오늘날 성도가 돈을 더 잘 벌 수 있습니까 아니면 불신자가 더 잘 벌 수 있습니까? 답은 명확합니다. 불신자에게 가능성이 더 있습니다. 잘 살려면 이방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결코 허황된 말만은 아닙니다. 44:15-19절을 보면 제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 이러했었습니다(우리의 속마음까지 이랬다가는 망합니다).

 

22장은 유대인들의 정죄를 받은 바울이 자신을 변명하는 곳입니다. 22절에는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유대인들이고 이러한 놈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어떻다고요? ‘살려둘 수 없는 자랍니다. 유대인들의 판정입니다. 이 판정을 25:24절에서 베스도가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이 확신이 얼마나 강했으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23:12)고 다짐하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열심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열심이라고요? , 분명 잘못된 열심입니다만, 유대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행해야 할 믿음과 관련된다고 여겼습니다. 26:6-7절은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랍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소송 이유가 뭐라고요? ‘하나님을 받들어 섬겨서 얻기 바라는 소망이랍니다. 유대인들(열 두 지파)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잘 섬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의 착각입니다.

 

24:5절에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며 이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염병처럼 저주받을 사람이랍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는 관점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선민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성도)와 같은 개념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세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사례들을 무척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정도 만으로도 제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고, 그럴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으며,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잘못된 열심은 교회 타락을 부추키는 한가지 원인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사례가 많음을 알아보았습니다. 통탄할 일이지만 실제임을 부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성도)는 어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마음을 찢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