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지금이 원어성경 읽기에 가장 적합한 때!
[단상] 지금이 원어성경 읽기에 가장 적합한 때!
א 도전 : 히브리어와 헬라어 알파벳 겨우 아는 실력으로, 원어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Ω
사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에게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부담이 될지 모릅니다. 워낙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외국어라는 차원을 넘어, 수천 년 전의 고어(古語)이기도 하고,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에 가깝기도 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입니다.
나아가 전문 신학자는 더 많은 외국어를 아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구약학자라면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기본이고, 수메르어, 아카드어(바빌론어), 페르샤어, 엘람어 등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학자라면 헬라어와 라틴어는 기본이고, 사본이 전해지는 곱트어(고대 이집트어), 고트어, 아르메니아어, 시리아어, 그루지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 등과 근세신학에 깊이 관련되는 독일어, 스페인어, 불어 등도 역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진대,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직장생활에 허덕여야 하는 일반성도에게, 원어성경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어는커녕 영어성경도 제대로 읽을 여유가 없기 일쑤입니다. 전문 신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수많은 외국어는 꿈일 뿐입니다.
교회생활하면서 원어(히브리어 및 헬라어)와 관련된 2가지의 기억이 씁쓸합니다.
하나는, 설교나 교육시간에 목사님들이 가끔 던져주는 원어 단어를 받아 적어서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서러움입니다. 이런 언어를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형편없는 지식을 탄식하며 지냈습니다. 거의 포기지경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상대방이 들고 나오는 원어로 인하여 주눅 들었던 기억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원어를 제시하며 이런 뜻이라는데 더 이상 무슨 대꾸를 할 수 있을 것인지요. 아주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최소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전 찾을 정도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법을 몰랐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넓을 뿐 아니라 기회도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으로, 여러 학자들이 수고한 깊은 지식들을 거의 공짜로 무한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각종 신학공부는 물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독학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관심과 시간과 약간의 비용(약 20만원 이내)을 투자함으로써 원어성경의 사전적 의미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된(최저 수준에 이르게 된), 개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1. 편리한 성경검색 : 비용 불필요(가입 필요).
과거에는 암송하거나 기억을 더듬어서 성경구절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노력집약적이고 시간소모적인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판 두어번 두드리면 즉각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트가 있습니다만(각기 장단점 있음), 가장 즐겨 애용하는 곳을 소개드립니다.
http://www.paradoxos.net/ 에서 ‘웹파워바이블가기’를 클릭하면 화면이 뜹니다. 해당 성경을 선택 후 해당 구절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하면, 한글 5종과 영문 5종의 성경이 동시에 뜹니다. 헬라어 성경도 칸이 3개 존재하지만(헬라어신약성경, 칠십인역) 활자가 깨어져 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한글 성경의 약자는 이렇습니다. : RHV(개역한글), CMV(개역한자), HKJV(한글흠정역), HCV(공동번역), HSV(표준새번역).
영어성경은 KJV, NIV, NRSV, RSV, ASV입니다.
이곳의 검색기능을 활용하면 성경 찾는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단축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어 헬라어 기본 교육 : 약간의 교재획득 비용 필요(가입 필요)
최소한 알파벳 정도는 알아야 시작이 가능합니다. 시작할 때 아주 유용한 곳입니다. 물론 더 고급 수준의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http://www.stauros.net/ 에 가입하여 무료강좌, 유료강좌 등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기초용 CD와 하드카피 교재를 구입하였습니다(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10만 원 대 이내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알파벳 공부를 했습니다.
「지종엽 목사 편저, 헬라어 공부 그렇게 하지마라, 하늘기획」을 한 권 더 추천합니다. “헬라어 성경해석 10일이면 가능하다!!”는 소개를 달고 있습니다(이는 중국식 과장법이지만 저자의 충심은 이해됩니다). 처음 접하는 초보자(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일반성도)라면 6개월 내지 1년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어 성경 검색 : 비용 불필요.
최근에야 겨우 발견한 춤 출 만큼 귀한 사이트입니다. 는">http://biblos.com/ 는 외국 사이트로서 가입 안 해도 이용 가능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거의 모든 나라 성경 즉, 히브리성경, 헬라어성경, 라틴어성경, 독일어성경, 일본어 성경, 중국어성경, 아라비아성경 등을 마음껏 검색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장점 중에서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3가지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첫째, 사실 독학생에게 있어서 히브리어 발음기호 식별은 너무너무 어려운 작업입니다. 우리나라 발음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말 진땀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어려운 발음이 거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Hebrew’를 선택하면 스트롱번호와 음역과 히브리표기와 영어가 표시됩니다. 음역을 그대로 읽으면 정확한 발음이 됩니다.
둘째, 헬라어의 문법분해(parsing)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명사 및 동사 등 각종 품사의 법, 시제, 태, 격, 성, 수, 인칭 등의 모든 정보들이 기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유용한 정도를 넘어 거의 손 안 대고 코 풀어도 될 만큼의 귀중한(엄청난) 자료입니다.
셋째, 라틴어 성경도 검색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라틴어는 이용이 편리한 편은 아닌데, 일단 여기서 단어를 검색한 후, 다른 ‘라틴어 사전’ 프로그램(사이트)을 이용하면 사전적 의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http://lysy2.archives.nd.edu/cgi-bin/words.exe가 좋을 듯합니다.
4. 성경 주석 : 약간의 비용
성경주석은 너무 방대하여 일반성도가 자비로 구입하는 것은 꿈꾸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에서 무료 주석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비용만 투자하면 좋은 주석을 구입하여 수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라는">http://www.bniel.net/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엄청난 자료를 수록한 CD들이 많습니다. 수 년 전 매튜헨리 주석 CD를 7만 5천원에 구입하여 컴퓨터에 깔아놓고 수시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용하면, 주석 확인은 기본이고, 히브리어든 헬라어든 발음과 의미 등등 거의 모든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단어가 성경에 몇 번 사용되었는지 등도 확인 가능합니다.
5. 기타 : 개인 보유 참고 자료들(위의 4가지만 있으면 없어도 무방)
가. 히브리어 성경 : 독일성서공회 간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1952년 판.
나. 헬라어 성경 : TR(Stephens) 및 GNT(UBS 3판).
다. Strong’s Concordance.
라. Greek-English Lexicon(BDAG).
마. 구약원어신학사전(색인, 상권, 하권).
바. 신약성서신학사전(킷텔 단권 원어사전).
사. IVP 성경주석(구약, 신약)
아. IVP 성경배경주석(구약, 신약)
자. IVP 성경신학사전.
차. 기타 콘사이스형 사전류 등.
길게 설명드렸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현재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실력은 알파벳 겨우 아는 수준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소개한 사이트(자료 포함)를 활용하면 구약과 신약을 읽고 쓰는 것과 사전적 해석 정도는 가능합니다. 인터넷의 순기능을 신앙의 증진에 활용하는 것은 슬기로운 처신일 것입니다.
둘째는, 어학 실력이 부족한 일반성도들이 제한적으로나마 원어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피와 땀의 결정체인 연구결과들을 아무 댓가없이 인터넷에 공개한 학자들께 무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연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 귀한 것을 아낌없이 공개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심어린 칭찬의 말씀이 있으실 것입니다.
셋째는, 이처럼 귀한 방법과 기회가 주어졌다면, 목회자들은 물론이요 일반성도들까지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자료들을 활용치 않는다는 것은 신앙을 등한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써야 할 것입니다.
위 3가지 고백의 요지는 일반성도들이 이 귀중한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 성경을 보다 깊이 있게 읽자는 것입니다.
물론 짧은 기간의 독학으로 전문 신학자들처럼 깊은 지식을 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하다보면 나날이 발전하는 즐거움을 맛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괄목할만한 증진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매일매일의 새로운 체험도 포함된다 여기고 있습니다.
비록 어학에 소질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원어성경의 사전적 뜻 정도는 읽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에, 자신 있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는 비단 개개인의 성경해석 능력의 배양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이 되리라는 확신입니다.
피와 땀 같은 귀한 자료를 공개해 주신 학자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어린 감사를 전해 드립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 아래 2편의 스크랩은, 성경원어를 배워야 할 이유와, 일반성도들도 신학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다른 분들의 글입니다.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옮겨 왔습니다.
[스크랩](신학) 왜 서양 고전어를 배워야 하는가?
(출처:http://www.kirs.kr/ 칼럼 황대우 교수 칼럼)
서양에서 고전어하면 그리이스어, 즉 헬라어와 로마어, 즉 라틴어를 의미한다. 헬라제국과 라틴제국은 서양 역사의 근간이요 모든 서양 문화의 뿌리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두 제국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를 깊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동양인인 우리가 한문도 아닌 서양 고전어를 배우고 익혀야 하는가? 그것은 헬라어가 신약성경의 언어이며 라틴어가 예수님 이후 서양 역사 가운데 1800년 넘게 가장 중요한 기독교 문서를 기록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뿌리와 역사에 관한 수많은 문서들 역시 원전이 라틴어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주요 개혁주의 관련 서적들 모두 영어 및 기타 현대어로 번역된 번역본의 재번역에 불과하다.
근자에 한국 기독교가 지나치게 서양에 의존적이라고 지적하면서 토착화를 부르짖는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토착화를 말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의 형성과 기원과 배경, 그리고 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토착화가 가능하다. 남미에서 토착화 신학으로 해방신학이 나왔다. 그런데 남미는 이미 종교개혁 시대부터 서구 문명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서양 문명과 그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해방신학의 명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토착화 신학인 민중신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민중신학은 해방 신학을 흉내 낸 아류일 뿐 그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에 단명한 것이다.
요즘 대학은 학문의 연마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시대정신에 맞는 취업 학원으로 변모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왜냐하면 취업 성공률이 곧 입학생을 모셔오는 지름길이고 입학생을 정수로 채워야 학교 유지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대학들은 저마다 취업률을 높이고 입학생을 모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외자 유치를 위해서도 앞 다투어 관심을 끌만한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쇼를 방불케 한다. 이런 쇼를 통해 단기적 취업 학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먼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다. 해마다 절대 학생 수가 줄어가는 이 시대에 끝까지 살아남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특성화 되고 전문화 된 학문의 전당으로 거듭나는 길뿐이다.
특성화란 남다른 독특한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다. 자신을 다른 존재와 구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신대학교의 특성화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 대학이라는 점에서 “신앙”이 특성화의 대상일 것이고, 수많은 기독교 대학들 가운데 “개혁주의”가 특성화 대상일 것이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다수의 대학 가운데 잎만 개혁주의가 아닌, 뿌리와 나무 전체가 “개혁주의”인 학문이 고신대학교의 진정한 특성화 대상이 아닐까? 전문화란 다른 누구보다 그 분야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다. 특성화와 전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자를 해야 한다. 고신대학교가 특성화 되고 전문화 될 때 제대로 된 장기적인 취업 학원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꽃도 좋고 열매도 많다.”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토양이 좋아야 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좋은 밭”처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대학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학문적인 전문화와 특성화를 이룩하려면 결국 “개혁주의”를 살리는 길 뿐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대학들 대부분은 단지 그것을 구호로 사용할 뿐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제대로 설명하는 곳이 거의 없다. 이것은 모두 개혁주의의 역사와 신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대로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투자해야 한다. 고전어 학습은 고신대학교가 개혁주의로 전문화하고 특성화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고전어 학습을 통해 개혁주의의 뿌리와 역사를 독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를 우리 토양에 맞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개혁주의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고신대학교가 개혁주의학술원을 개원하고 개혁주의전문도서관을 운영하게 된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시작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으려면 학교 전체뿐만 아니라, 교단 전체가 이 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참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해야 할 것이다. 고신대학교 정체성 확립과 생사 여부는 어쩌면 바로 이것에 달린 것이 아닐까?
서양 학자들과 함께 학문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원문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서양 학자들도 1류와 2류로 구분되는데, 그 기준 역시 원문을 다룰 수 있는 능력 여부이다. 원문을 모르면 결국 다른 사람이 연구한 결과, 즉 2차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얼마나 권위가 있겠는가? 이런 점을 고려하여 고신대학교 개혁주의전문도서관은 개혁주의 관련 원 자료 수집과 그 원 자료를 연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계획, 추진하고 있다. 지금 형편으로는 이 일이 신기루를 좇는 것처럼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이 꿈이 현실이 되는 날, 고신대학교는 창공을 높이 날아올라 멀리 바라보는 독수리처럼 비상하고 도약하여 높은 곳에 우뚝 선 기독교 학문의 전당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스크랩](신학) 신학 하는 그리스도인
(출처:http://www.kirs.kr/ 칼럼 이환봉 교수 칼럼)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신학하는 사람이 되자! -
한국 교회는 그 경이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문화 속에 보다 완숙한 차원의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복음과 문화를 분리하여 생각하고, 영적 부흥과 실제적 삶을 연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적 신앙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 또는 역동화하지 못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 내지는 화석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앙과 생활 속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자신의 실재적인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신앙과 생활의 이중적인 틀 속에서 끝없는 갈등과 혼동 그리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서의 “아멘!”이 일상생활의 현장에서의 “아멘!”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영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유아들은 자신의 생활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거나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형성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없다. 성숙하여 장성한 사람들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상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으로 성숙하여 온전한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충만에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우리는 단순한 믿음과 전적인 신뢰를 특징으로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막 10:15)은 늘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나 항상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히 5:12) 유아적인 신앙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로 부터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할 유아들이 많이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말하고 깨달으며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날로 새롭게 배워가는 자이다. 그래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장성한 자들이 되어 단단한 식물도 먹으면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히 5:13-14)이 되어야 한다.
특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보다 성숙하여 갈 것을 권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곧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학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우리 영혼의 양식을 제공한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영혼은 먼저 그 지성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먼저 내 머리 속에 있지 아니한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속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을 우리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보다 더 온전히 알면 알수록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더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을 때에 그 “뜻”은 “생각하는 기능, 지성, 이해”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하여 신학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하나님 지식의 추구를 위한 신학연구의 노력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지식이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이라는 것은 아니다.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기 위하여 꼭 있어야만 하는 조건을 말한다. 그것 없이는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산소(oxygen)는 불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산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사실상 우리에게 천만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산소가 자동적으로 불을 일으킨다면 온 세상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소는 불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불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체계적 지식(신학적 지식)은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영적 성장을 위해 꼭 있어야할 필수조건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속에 불 붙여 주셔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참된 하나님 지식이 없이는, 신학하지 않고서는, 신학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영적 성장도 온전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며 구원(성화)을 온전히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을 먼저 바로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한 것이다(요17:3).
그 외에 성경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롬10:17, 롬1:16, 마28:19-16, 요17:17, 엡6:17, 살후2:16).
하나님은 우리가 부지런히 신학을 연구하도록 명령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교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은혜 안에서 날로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숙한 지혜는 성숙한 생활을 위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적 생활을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장성해 갈 것을 명령하신다(엡4:13).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영원히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며 만족을 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자랑할 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나를 아는 것과...깨닫는 것이라”(렘9:23-24).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거룩한 의무이기도 하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하나님의 율법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서 하나님의 계시에 능한 자들이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보다 더 분명하고 높은 수준의 성경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전체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진리에 대한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연구(요5:39), 상이한 부분들의 비교와 조화(고전2:13), 그리고 계시의 큰 중심적 사실(골1:26-27)에 유의함으로 보다 온전한 하나님 지식에 이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이 대부분 교회의 성경공부가 성경 개별 본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구체적인 적용에 치중함으로 성경전체와 하나님의 포괄적인 뜻(the whole counsel of God)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교회들의 새로운 인식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삶이 없어도 건전한 신학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건전한 신학이 없이는 건전한 삶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의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건전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 그 이상의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로 신학연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적인 존엄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